부산 신발의 100년 역사 황금 신발 테마거리 구경하기

2023. 9. 14. 21:47정보 공유/정보 공유

728x90
반응형

오늘은 황금신발 테마거리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부산 부암동에 황금신발 테마거리가 생긴 걸 아시나요?

저도 우연치않게 지나가는 길에 신발모양의 조형물이 눈에 띄어서 보게 되었는데 부암동 이곳이 황금 신불 테마거리라고 하네요.

부산이 옛날부터 운동화로 유명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신발공장이 다 문을 닫고 그 곳에는 아파트나 상가 등으로 변해버렸지만 그 시절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실텐데요.

그리고 저는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팻말에 신발 공장에서 일하시던 분들의 이야기과 사진들도 볼 수 있었고 여러 조형물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산 신발의 현장을 함께한 이야기들

 

1979년 처음 입사한 해 재봉 3과 초짜들이 거쳐 가는 곳에서 신발끈 구멍 내는 일 (하도메) 보조를 하며 언니들과 생활했다. 그러다 학생들만 근무한다는 재봉5과에 자동 차출되어 학생 라인으로 갔다 그곳에선 조장 언니를 보조하는 일을 했다.

기계에 풀빵 굽듯이 신발도 그렇게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가끔 철야 작업을 위해서 수업 마치고 밤 야간 근무까지 했다.

엄마 같은 직장언니를 만나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편하게 일했던 거 같다.

가끔 친구들이 힘들게 일했다고 옛날 그 시절 생각하기 싫다 해도 난 그 시절이 좋다. 나름 공부한답시고 중앙시장 근처 독서실에 처박혀 연합고사도 치러봤다. 동주여전 유아교육학과 야간반 합격통지서 들고 집에 가니 부모님께서 꼬깃꼬깃 모아두신 돈 등록금 하라며 주셨는데 두 동생 생각에 내가 포기했다. [이희숙]

 

반응형

 

국어를 좋아해서 늘 책을 가까이하던 소녀는 친구랑 대학교 국문학과 가자고 약속하고 꿈에 부풀어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시던 어머니께서 논두렁에 쓰러지셔서 난리가 났어요. 며칠 후 회복되셨지만 위로는 대학 다니는 오빠, 밑으로 남동생 줄줄이 돈 들어가야 했지요. 나 하나라도 힘이 되어 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돈을 벌러 부산에 왔습니다. 첫날 기숙사에 왔는데 방이 마루판에 장판만 깔아 놓아서 그 겨울 이불도 없이 얼마나 춥던지 같이 갔던 친구 넷이서 서로 부둥켜안고 평평 울었습니다. 걱정하실 부모님을 생각해서 잘 지내고 있으니 격정하지 마시라고 편지를 쓰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어린 조그만 소녀가 스스로 선택하고 이겨낸 시절이 있었기에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어떤 시련도 잘 견디며 지금까지도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이금원]

 

 

뒷집 순이의 사촌 언니가 다닌다는 신발공장에는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면 정규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는 제도가 생겼다는 말에 중학교 때들고 다니던 가방에 갈아입을 몇 개의 옷만 넣어 고향을 떠났다. 어려운 환경에도 선배 친구 후배들과 일하며 공부하던 보람차고 자랑스러운 지난날들을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구자옥]

 

중학교 3년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여벌의 옷과 이불 보따리를 든 채로 친구 40여 명과 신발공장에서 준비한 대형버스에 올랐다.

그날 운동장에는 배웅 나온 부모님과 가족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헤어지는 우리는 눈물바다가 되었고 창밖의 어머님들도 연신 눈물을 훔쳤다. 처음 접하는 환경과 생활, 부산의 진한 사투리와 억센 억양과 거칠어 보이는 사람들 솔직히 무섭고 겁이 났다.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용기도 적응할 자신도 없었다. 작고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현실이었다. 저녁 9시에 실시하는 군대식 점호와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기상벨 소리, 대야를 들고 줄을 서서 씻을 물을 받아야 하며 덥고 추운 기숙사 방이며 식사 때마다 식판을 들고 밥을 배식 받는 초라함과 불편함.. [천경숙]

 

 

눈물 나는 일은 거둬들이고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겨둔 내 인생에 40년 전의 이야기다. 그 하늘 아래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내 추억! 살아 숨을 쉬는 삶의 활기로 가득 찼던 현장 그 미싱 소리들. 조장언니들의 우렁찼던 목소리 속에서 행복도 슬픔도 희로애락을 즐겼을 이도 우리네선배님, 후배님들. 각자에게 보물처럼 남아 있을 그 추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또 다른 힘이다. [이기순]

 

신발공장에 미싱 돌아가는 소리, 바늘에 손가락이 끼어서 고함치는 친구와 언니들의 소리, 퇴근 때 경비실 몸 검사(혹시나 신발을 훔칠까봐 몸 전체를 더듬던), 기숙사에서 저녁점호 시간마다 서열대로 않아서 보고(진달래 15호실, 전체인원 8, 현재 인원 8, 이상 무, ). 난방이 안 돼 서로를 껴안고 체온으로 버티던 일, 겨울에도 찬물에 머리 감고 공장으로 달려가면 머리카락에 생긴 고드름 등등. 내 인생에서 그 시절 어려움은 오뚝이처럼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인옥]

 

삼화여상 총동창회 참여 (부산 최초 산업체 부설학교)

 

 

그때 그 시절 신발공장에서 일 하신 분들의 이야기 너무 감동적이면서 재미있었어요.

조형물을 보면서 안내판 글을 보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다른 쪽에는 동길산 시인이 쓴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 - 부산진구 신발이야기라는 책 내용 중 일부가 적혀 있었어요. 한국 신발 100년사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비매품으로 되어 있네요. 도서관에 가면 있을려나??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찾아봐야겠어요.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

 

1980년대 한국은 신발의 세계 챔피언이었다. 나이키가 한국에 와서 신발을 만들었고 리복이며 아디다스가 한국에 와서 신발을 만들었다. 한국의 고급 혁제운동화는 이탈리아의 구두, 대만의 플라스틱화와 함께 세계 신발시장을 석권했다. 한국의 신발 중심지는 부산이었다.

1950년대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신발대기업은 죄다 부산에 있었다. 서울이 정치수도였다면 부산은 경제 수도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있던 기업과 광복 이후 신흥기업, 그리고 한국전쟁 피란 기업까지 합세해 부산은 그야말로 한국 신발, 한국경제의 중심이었다. 부산진구는 부산 신발의 중심지였다. 1950년대부터 한국을 대표하던 8대 신발 대기업 가운데 범일동 국제고무와 사상 신라고무를 제외한 6대 대기업 모두가 부산진구에 있었다. 그러므로 부산진구는 부산 신발의 중심이었으며 한국 산발의 중심이었으며 한국 신발의 중심이었으며 세계 신발의 중심이었다.

 

 

그때는 신발이 부산을 먹여 살렸고 한국을 먹여 살렸다. 가진 거라곤 맨주먹뿐이던 그 시절, 두 세 집 건너 한 집이 신발로 먹고살았다. 아침 출근길과 저녁 퇴근길은 온통 신발이었다.

신발회사 로고를 단 통근버스가 시내 도로를 누셨다. 앞차도 신발회사 버스였고 뒤차도 신발회사 버스였다. 광고도 그랬다. TV가 귀하던 시절, 라디오를 켜면 온통 신발 광고였다.

신발은 지금으로 치면 최첨단 스마트폰이었다. 방송사마다 신문사마다 연말이면 신발회사에 감사패를 전달했다. 광고 많이 실어줘 고맙다는 감사패였다. 세계 신발의 중심 부산진구의 신발 대기업 근로자는 평균 1만 명이 넘었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업종인 만큼 여성과 남성이 7:3 또는 8:2 비율이었다. 기혼도 많았고 미혼도 많았다.

미혼은 대개가 타지 출신이었다. 진주와 거창, 통영, 안동, 포항, 영주, 김천, 순천, 광주, 전주

등지의 경남북과 호남 출신이 많았다. 제주도 출신도 꽤 됐다. 객지 고무공장에 취직할 정도로 어렵게 컸으므로 생활력은 엄청 강했다. 월급이 10만 원이면 생활비 제하고 8, 9만원을 적금에 들었다. 어린 여공은 중졸 출신이 태반이었다.

 

 

1980년대가 그랬고 그 이전 1960년대, 1970년대는 국졸이나 무학도 많았다. 1980년대 시골 중학교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 부산의 회사 버스들이 교문 앞에서 죽쳤다. 기숙사와 야간학교를 갖춘 부산의 신발 대기업 통근버스였다. 이들은 졸업을 앞둔 3학년 가운데 취업 희망자를 사전에 받아서 졸업식 날 부산으로 데려왔다. 여공들 삶은 고단하고 신산했다. 하지만 삶의 방향은 뚜렷했다. 비록일부에서 '공돌이. 공순이'라고 낮추어 대했어도 스스로 현실을 타개했으며 스스로 현실을 극복했다. 안 입고 안 쓰며 동생들을 진학시켰으며 적금 든 돈으로 고향집 논밭을 샀다. 철야를 오히려 자청하며 지역경제를 살렸고 한국경제를 살렸다. 그들의 삶은 정말이지 거대했으며 정말이지 감동적이었다. 신발대기업은 현재 부산진구에 하나도 없다.

굴뚝산업으로 여겨지면서 그 자리엔 대부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삼화고무가 그렇고 동양고무가 그렇고 태화고무가 그렇고 대양고무가 그렇다. 보생고무 자리에는 부산 최고의 번화가답게 고층 상가가 들어섰으며 진양화학자리에는 디지털 상가나 식당이 들어섰다.

한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주역인 한 세대 이전 신발 근로자와 신발산업! 그들은 두고두고 기념하고 기려야할 한국의 자랑이고 부산의 자랑이며 우리 부산진구의 자랑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그들이 있었기에 여기 우리가 있다.

 

동길산 시인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 저자

 

글을 읽으면서 고생하셨던 분들의 생각도 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혹시 시간이 나시거나 테마거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구경해 보시는 것도 좋은 듯 해요. 서면과 가까운 부암동이니까 걸어서 다녀보시면 재미있으실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재미있는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728x90
반응형